과거의 나에게

안녕, 과거의 나야.
일단 사는 내내 너무 멍청이 취급해서 미안해.
사람들이 모지리라고 손가락질할 때 앞장서서 동조한 것이 가장 미안하다.
나는 나인데 너무 남처럼 굴어 왔던 것 같아.
남들은 자기 생각만 하고 나도 남 생각만 하니까 내 생각한 사람이 없어서 내가 외로웠던 것 같아.

근데 나 사실 내가 똑똑하다는 증거를 딱히 찾지는 못했어.
어쩌면 과거의 나랑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는 나랑 미래의 나까지 정말 통째로 바보인 건가 생각해.
근데 이제는 내가 혹시나 똑똑할지 남들에 비해 몇 등일지 생각하는 자체가 완전 지루해.
어차피 내가 바보라고 하더라도 난 천재가 되는 것보단 사람들과 둘러앉아 노는 것에 관심이 있어.

어차피 우리 엄마가 재미있게 사는 사람이 제일 똑똑한 사람이라고 했거든.
그래서 난 재미를 잃지 않으려고 늘 유머에 대해 생각해.
계속 웃는 게 한 번도 울지 않는 비법이 되기도 하는 것 같아.

예전에는 과거는 고정불변이고 현재와 미래만 변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인생은 한번 지나가면 끝인 타임라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오히려 동그란 시계 같다고 생각해.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시계 속의 초침 분침 시침 같아.
각자의 속도로 계속 돌면서 마주치고, 지나치고 겹치면서 비로소 인생이 흐르는 것 같네.

어쨌든 과거의 나야,
네가 여러 가지 수모를 버텨 주어서 내가 지금 이런 말도 할 수 있는 여유 있는 사람으로 컸다.
고마워. 네 덕분이야.

그리고 난 아직 다 안 컸으니까 나를 잘 지켜보렴.
안녕.



출처: 민음사TV [ 6년 차 ADHD 정지음 작가가 보내는 위로 | <젊은 ADHD의 슬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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